Untitled Document
2018. 10. 18 木
로그인 회원가입 스크랩 기사제보
   
시민기자방
 
청소년기자
 
전체기사
남원
    

Home > 시군소식 > 남원
 
남원 교룡산성과 남원성

‘고룡’(古龍)을 찾아간다. 그 의미가 오래된 용쯤 되겠는데, 고을의 이름이 절묘하다. 고을의 운명과 일치한다. 고룡은 남원이다.


그곳이 아직 백제의 땅이었을 때 그렇게 불렸다. 고룡은 또 교룡(蛟龍)으로 전환되기도 한다. 남원에는 두 개의 성이 있다. 고을의 중심을 두른 남원성이 있고, 외곽을 둘러친 교룡산성이 있다. 두 성의 이름은 다르지만 같다.

성이 두 개라면 그 고을의 운명 알만하다. 결코 만만하지 않은 세월이었을 것이다. 그 오래된 시간을 만나러 남원에 간다. 초가을 정오 무렵이다. 남원은 역사 속의 도시다. 현재에 서서 여전히 과거의 잔영 속에 묻혀 산다. 춘향이나 광한루가 그렇고 또 만인의총도 그렇다. 형체를 제대로 보전하지 못한 남원성 곁에서는 고추나 토란이 자란다. 남원에서는 역사가 일상이다.

남원의 역사는 지켜냄의 역사다. 이미 백제 때부터 그곳은 군사 요충의 중심이었다. 쉴 새 없는 전투가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지켜내기 위해 목숨을 잃었다. 1500년 전 그곳은 백제와 신라의 국경이었고, 600년 전 이성계는 황산에서 왜구와 싸웠다. 정유재란 때는 남원 사람 거의 전부가 남원성에서 목숨을 잃었다. 동학군의 중심에도 섰으며 한국전쟁 때는 피의 바람이 불었다. 지리산의 일부가 남원을 걸치고 있다.

광한루를 지나 남원성으로 향한다. 네 개의 성문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고 성벽도 무너졌다. 동학농민혁명과 근대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성은 목숨을 보전하지 못했다. 전라선이 뚫리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성벽도 거의 사라졌다. 극히 일부만 남았다. 그마저도 복원의 흔적이 역력하다.

남원성은 아픔의 역사다. 누구를 공격하지 않고, 오로지 침입자를 막아내는 데 익숙했던 우리의 역사에서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나 쉽게 물러서지는 않았다. 결국 성을 내주는 것으로 끝이 났지만 맞서 싸웠다. 막아섬의 정점은 정유재란 남원성 전투다. 그때 남원 사람 거의 전부가 죽었다.

오래 된 성벽을 만진다. 지난 시간은 그 성벽 안에 모두 들어앉아 있다. 눈을 감으면 성벽 안에서 치열한 전투의 소리들이 들려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벽을 벗어나면 평안하다. 성은 이제 군사들이 아닌 일반의 사람들을 불러모아 땅을 내준다. 성 주변으로 밭이 넓다. 콩도 자라고 들깨도 자라고 토란도 자란다. 다 여문 옥수수는 서서 노랗게 말라간다. 마치 병사들처럼 줄을 맞춰 길게 도열한 고추는 가을빛이 붉다.

옛날에 전부 다 무너져 불고 없어. 한 몇 년 되야, 요것만 다시 만든 것이여. 쩌 너머로 가면 이르케 높은 성벽말고 돌담처럼 낮은 것은 쪼끔 남았어. 성벽 다시 세우고 공터가 남은께 역다 콩이랑 고추랑 심어서 묵어. 그 재미가 쏠쏠해.” 남원성 주변에 사는 박순례(59)씨의 말이다.

정유재란의 시작과 동시에 왜군은 거점 부산에서 남서진한다. 그 동안 넘보지 못했던 전라도를 얻기 위해서였다. 조일전쟁이 시작되고 초반 5년 동안 전라도는 건재했다. 그러나 이순신이 없는 바다는 금방 무너졌다.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이 전멸하는 순간 전라도는 든든한 버팀목을 잃었다.

왜군은 바다에서나 육지에서나 연전연승했다. 허울뿐인 명군은 전쟁보다 도망 다니는 것에 더 익숙했다. 어차피 명분만 갖추면 됐고, 제 나라를 위한 전투가 아니었다. 심하게는 사방이 포위된 제 나라 장수의 원군 요청도 묵살했다.

남원성 전투는 정확히 하루만에 끝났다. 애초에 싸움이 되지 않는 전투였다. 남원성 네 개의 성문을 포위한 왜군의 병력은 5만6000명이었고 모두 주력부대였다. 전투를 진두지휘한 장수는 고니시였다. 남원성의 조선군은 고작 1000명, 쓸모 없는 명군이 3000명. 또 몇 천의 백성들, 그것이 싸울 수 있는 사람의 전부였다. 남원성의 북문을 지켰던 방어사 오응정, 조방장 김경로, 구례현감 이원준이 화약고에서 얼마간의 왜군과 같이 자폭하는 것으로 하루 밤과 낮의 전투는 끝이 났다.
그 날 하루 동안 1만 명이 죽었다. 성 안의 거의 모든 집들이 불에 탔으며 겨우 민가 몇 채만 남았다. 전투가 끝나고 왜군은 남원의 조선 사람은 보이는 대로 살육했다. 코와 귀를 베어 본국으로 보냈다. 그렇게 죽은 모든 조선사람의 시신을 한 곳에 모아 합장했다. 그곳이 바로 만인의총이다.

기록에 의하면 남원 땅에서 온전하게 목숨을 보존한 집단은 도공들뿐이었다. 물론 살아도 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지금에 와서 일본의 역사는 조일전쟁을 도자기전쟁이라고 고쳐 부르기도 한다. 그들은 7년의 전쟁을 통해 도자기 기술을 얻었다. 남원성 전투가 끝나고 포로로 잡혀 일본으로 끌려간 남원의 도공만 70여 명이었다.

남원성을 떠나 교룡산성으로 간다. 길이 가깝다. 다리 하나를 건너면 교룡산으로 오르는 산길이 시작된다.

거대한 성벽이 길을 막아선다. 홍예문((虹霓門)이다. 원래 교룡산성에는 동서남북 4개의 문이 있었다. 지금은 동쪽 홍예문만 남아 있다. 성문이 미학적이다. 무지개의 형상이다. 벌교 홍교 일부를 옮겨 놓은 거 같다. 그 문 영화에도 등장한 적이 있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춘향뎐>이다. 과거 급제한 이몽룡이 초라한 행색으로 남원으로 들어오던 장면, 거기서 다시 3년 만에 방자를 만난다. 색감이 고풍적으로 살아있던 화면이 잊혀지지 않는다. 영화를 볼 때 어디일까 궁금했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성문을 이전에 본 적이 없었다. 알고 보니 교룡산성 홍예문이었다.

길을 왼쪽으로 틀어 성벽을 밟고 오른다. 성벽 위의 길은 금방 끊긴다. 성벽은 일부만 복원돼 있다. 길이 있다가도 자꾸 끊기는 산길을 타고 더 오른다. 지금은 누구도 다니지 않는 길이지만 옛 사람들은 길이면서 또한 성벽인 그 위에서 목숨을 걸었다. 옛 교룡산성의 무너진 석재들이 잡풀이 우거진 길을 따라 널려 있다.

1894년 무너진 교룡산성의 성벽에 서서 새 세상을 꿈꾼 사람이 있었다. 전봉준, 손화중과 더불어 동학군의 3대 지도자였던 김개남이다. 전주화약이 끝나고 고향 태인에 머물던 김개남은 그 해 6월25일 남원으로 들어왔다.

김개남은 일생 동안 강경한 노선을 걸었다. 그는 타협을 믿지 않았다. 변혁은 깨트리려는 자가 지키려는 자와 맞서 싸울 때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김개남은 전라감사 김학진의 회담 제의를 단칼에 거절했다. 그가 믿는 것은 오직 농민들의 힘이었다. 그의 하늘은 다른 누구도 아닌 농민이었다.

8월20일 김개남은 다시 움직인다. 농민군 1000여 명을 이끌고 남원성과 교룡산성을 점령했으며 군기고를 부수고 무기를 탈취해 무장했다. 그리고 교룡산성을 거점으로 농민들의 집회를 열었다. 큰 대나무로 장태를 만들고 밧줄과 화약, 짚신을 모았다. 삼대를 구해 옷과 발싸개를 준비했다.

그때 이미 일본군대는 청일전쟁의 승리 후 농민군 토벌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그는 일본과 싸울 준비를 했다. 다급해진 전봉준과 손화중이 직접 남원을 찾아와 그를 만류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세 사람의 회담에서 그가 남긴 한 마디는 이랬다. “한 번 해산하면 큰 무리는 다시 모으기 어렵다.” 그의 휘하 농민군은 무려 6만 명이었다.

그 해 10월12일 김개남은 교룡산성을 떠나 청주로 진격한다. 전봉준의 부대는 공주로 나아갔다. 전봉준은 우금치에서 대패했고, 김개남도 청주에서 패배했다. 그의 꿈은 교룡산성을 떠나는 순간 무너졌다. 그렇게 농민들의 혁명은 끝이 났고, 녹두꽃도 떨어졌다. 그리고 김개남은 다른 지도자들과 달리 재판도 없이 전주에서 곧바로 임의 처형되어 효수되었다. 그의 강경한 노선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교룡산성에 가서 기억해야 할 것은 많다. 눈에 담아야 할 아름다움도 많다. 선국사가 있고, 승병장 처영은 그 성을 정비하고 왜군과 맞서 싸웠다. 터만 남은 은적암에서 동학교주 최제우는 <동경대전>을 완성했다.

교룡산성에 간다면 그 사내 김개남이 믿었던 하늘도 한 번쯤은 떠올려 볼 필요가 있겠다. 자기의 하늘을 지키는 힘은 스스로에게서 나온다.

글 = 광주드림 정상철 기자 dreams@gjdream.com

사진= 광주드림 안현주 기자 presspool@gjdream.com


가는 길: 88고속도로를 타고 남원→남원경찰서를 지나 다리 하나를 건너면 만인의총→갈림길에서 산곡동 방면으로 좌회전→1km쯤 계속 직진하면 교룡산성 주차장.
06-10-22 12:11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가장 많이 본 뉴스
회사소개 | 광고안내 | 기사제보 | 이용약관 | 개인정보보호정책 | 기사올림방
발행소 : 전라북도 익산시 부송동 1120번지 707동 302호(제일5차아파트 상가3층) 소통뉴스
TEL. 063)837-3773, 837-3445  FAX. 063)837-3883  사업자등록번호 : 403-81-42187   편집국이메일 : sotongnews@empal.com
(유)소통뉴스 발행인 : 이백순 편집인 : 공인배 정기간행물등록번호 : 전북 아 00009 등록년월일 : 2006년2월2일
Copyright (c) 2006 SOTONGNEWS.CO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