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는 참아주고 인정하는 것
▲ 지난해 효열장 박정숙씨, 고부갈등 없는 일상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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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낱의 아들이 말똥말똥 살았는데도,/재롱을 부리는 사랑스런 손주들이 열이나 넘는데도,/어머니는 다만 산촌에 계서 쓸쓸히도 이날을 보내십니까./생각하면 저희 형제는 못난놈들이외다,/늙으신 어머니를 산골에 내버려두어/굽으신 허리는 활등처럼 더 굽어 하늘을 보지 못하오니/어머니 어머니는 그렇게 사셔야 됩니까./이 자식은 십 년째나 늙으신 어머니를 속였음이나 무에 다르오리까/해마다 올해는 편안히 모시겠다는 그 말을, 그러나 나의 어머니여,/이 땅의 가난한 어머니들이여 불쌍하외다.”(박세영, '산촌의 어머니')
익산시 춘포면 춘포리. 춘포에 흐르고 있는 만경강을 지나 둑 아래 구담마을이 작년 익산시민의장 효열장의 주인공 박정숙씨가 살고 있는 곳이다. 새색시 볼연지마냥 환하게 물든 철쭉과 한쪽 구석에 쌓인 친환경 유기질비료 푸대 더미가 어쩐지 잘 어울리는 볕좋은 시골마당에서 박정숙(53)·강재욱(57) 부부를 만났다.
‘만성천식으로 고생하는 시아버지를 봉양하며, 교통사고로 손이 불편한 남편 대신 농사일을 하며, 마을 부녀회장으로 솔선수범하는 여성영농지도자’.
효열장 수상의 내용을 접하며 대장부 같은 농촌아줌마를 그렸던 기대는 첫 인상에서부터 완전히 어긋났다. 농사꾼 치고 하얀 피부에 선해 보이는 눈매와 호리한 몸매가 그랬는데, 말하는 품새는 더욱 그러했다.
박씨는 스물아홉에 중매로 남편 강씨를 만나 또래에 비해 늦은 결혼을 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24년을 시댁인 춘포에서 살았다.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강씨가 오토바이 사고로 손을 못 쓰게 되면서 농사일은 대부분 박씨의 차지가 되었다. 게다가 직접 대놓고 듣지는 않았어도 ‘집안에 여자가 잘못 들어와서 남편이 다쳤다’는 피해의식에 마음고생이 심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시어머니 성격이 순하고 내성적이라는 것.
“근본이 순하신데다 내성적이라 못마땅한 게 있어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셔서…. 한마디로 점잖으셔요.” 며느리 박씨의 시어머니 평이다.
“고부가 성격이 꼭 같아. 아주 너무 닮았어.” 옆에서 남편 강씨가 거든다.
함께 사는데 성격이 비슷한 것은 좋지 않다고들 한다. 오히려 티격태격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고부’라는 특수한 관계 때문일까, 아님 서로 참아주고 인정하기 때문일까, 고부갈등은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다.
늦은 결혼에 아이도 10년이나 지나 생겼는데 그 동안 아이에 대한 스트레스는 한 번도 주지 않았던 시어머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부부끼리 잘 살면 그만이지…” 덩달아 느긋했던 부부가 신앙에 매달리며 기도할 즈음 딸 한나(14)를 얻었다.
시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가장 좋은 점이 바로 자식교육이다. 부모님의 모습을 그대로 보고 자란 한나는 특별히 가르치지 않았어도 어른을 공경하고 부모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유난히 깊다.
그렇다면 시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서운하거나 싫었던 적은 언제일까? 박씨는 “어머니가 워낙 순하기도 하시지만, 그런 일이 있어도 귀 딱 막고 살아야지…”라고 대답한다.
생판 모르는 남남이 만나 스물 네 해를 살았는데 왜 서운할 적이 없었고 속상했던 때가 없었겠는가마는, 꼬치꼬치 들춰내지 않고 좋게좋게 생각하는, 남다르게 긍정적이고 선한 눈이 이런 감정들을 이겨냈을 터이다.
“마음이 비단 같어. 내가 바빠서 도와주지도 못하는데도 불평 한마디 없이 일하고 어머니 맘 편하게 해 드리고…. 그러니 항상 이쁘지. 떠받들고 살아도 시원찮아.”
익산시농민회 회장을 맡고 있어 바쁜데다가 불편한 손 때문에 부인을 맘껏 돕지 못하는 것이 못내 속상한 남편이다.
만성천식으로 외출을 조심하고 있는 시어머니 김복정(88)씨가 봄볕을 쐬러 마당으로 나왔다. 철쭉을 배경으로 환하게 웃는 세 식구의 얼굴이 참 많이 닮아 있다. 부부이건, 고부이건, 가족이란 서로가 닮아가는 존재가 아닐까? 일상처럼, 서로 익숙하고 편하게 물들어가면서 말이다.
소통뉴스 엄선주 기자